여름이 시작되는 날, 운동장에서 조금은 엉성한 자세로 느릿느릿 걸으며 뛰는 젊은 청년이 있었다. 나는 운동을 마치고 의자에 쉬며 앉아있었는데, 그 청년이 뛰다가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에는 느리게 뛰더니, 내가 앉아 있는 곳을 통과할 때마다 인사를 하면서 점점 달리기 속도가 붙어갔다. 한 바퀴 두 바퀴 .. 마지막 여 섯바퀴까지 그는 열심히 달렸다. 청년은 땀을 흠뻑 흘리고, 나를 향해 손인사를 하며 완주의 환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운동장의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로지 나였다. 그 청년은 왜 나에게만 계속 미소를 보내며 손을 흔들어 주었을까?
청년이 운동을 마치자 활동보조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아주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청년의 땀을 닦아주었다. 청년은 자리를 떠날 때까지 나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은 “그만 인사해.” 하면서 청년을 제지했다. 그저 반갑게 인사했을 뿐인데, 보통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까지 인사를 주고받지 않으니 어색하셨나 보다.
하지만 난 우리 아이덕분에 익숙한 상황이라 계속 그 청년과 반복해서 인사를 주고 받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래 알고 지낸 사이로 생각했을 것이다.
‘혼자서 저렇게 끝까지 달리다니 정말 대단하네..’ ‘우리 아이도 성인이 되면 저렇게 혼자 해낼 수 있을까?’ 그 청년이 달리는 내내 그 생각을 하면서 지켜봤던 것 같다. 영화 <마라톤>의 초원이처럼, 그 청년도 달리기 훈련을 하는 것 같았다.
아참 그런데 그 청년은 나를 어떻게 알아본거지? 내 얼굴에 ‘발달장애인 어머니’ 라고 써 붙여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해했다.
어느 날은 처음 보는 장애인분이 유독 나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고, 모르는 장애인분이 나에게만 과자를 건네고 가신 적도 있었다. 유독 장애인 당사자 분들이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없이 알아본다. 그렇다면 같은 삶의 경험을 쌓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것일까?
비슷한 일은 우리 아이에게도 일어났다. 아이가 센터로 이동하는 차 안, 해질녘 노을이 아름답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직원처럼 보이는 성인남성분이 굿윌스토어 사원증을 목에 걸고, 회사건물을 나와 퇴근 중이었다. 굿윌스토어는 성인발달장애인분들이 일하는 직업장으로 유명해서 나는 그분이 발달장애인이라는것을 한번에 알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우리 아이였다. 그 남자분을 보자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
아이가 차의 창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양손을 흔들었다. “형아 안녕~~~” 그분도 우리 아이를 보더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안녕~~”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둘은 서로를 알아본 것일까? 아이는 그곳을 벗어나 이동하는 중에도 형이랑 인사를 나눈 것이 재밌었는지 한참을 재밌다고 깔깔거렸다.
정말 발달장애인은 발달장애인을 알아본 것일까? 발달장애인은 발달장애인의 엄마인 나를 알아본 것일까? 운전 중 빨간 신호에 멈춰서서 백미러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는 그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계속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인사와 상대에게 호의적인 미소는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드는 것 같다. 나는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나는 안전해요. 나는 당신과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미소를 건네는 여유로운 날이 오길 바란다.
[기자수첩] 장애인의 한 표는 준비돼 있는가…참정권 보장, 교육에서 시작된다
발달장애인 맞춤형 선거교육 확대 필요 투표 참여 넘어 ‘주권자 시민’으로서 권리 행사 지원해야
<사진=한국장애인개발원 제공>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정치권은 유권자의 한 표를 얻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보 접근의 한계와 제도적 장벽으로 인해 참정권을 온전히 행사하기 어려운 유권자들이 존재한다.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장애인 유권자들이 대표적이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세종특별자치시장애아동·발달장애인지원센터가 최근 진행한 발달장애인 대상 맞춤형 선거교육 프로그램은 이러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센터는 주간활동서비스 이용자와 장애인보호작업장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정책선거의 의미와 투표 절차를 설명하고, 모의투표 체험을 통해 실제 선거 과정을 익힐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선거는 단순히 투표소를 방문해 기표하는 행위가 아니다. 후보자와 정책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사를 판단해 선택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과정이다. 하지만 많은 발달장애인들은 복잡한 선거 정보와 어려운 용어 때문에 선거에 대한 이해 자체가 쉽지 않다. 선거공보물이나 후보자 공약 역시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아 정보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 격차가 결국 투표 참여율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장애인 참정권 보장 논의는 오랫동안 투표소 접근성이나 이동권 문제에 집중돼 왔지만, 최근에는 이해하기 쉬운 정보 제공과 선거교육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되고 있다. 투표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발달장애인의 경우 반복적인 체험과 쉬운 설명이 병행될 때 선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교육에서 진행된 모의투표 역시 실제 선거 환경을 미리 경험함으로써 낯선 절차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자신감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은 특정 집단에 대한 배려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의 완성도와 직결된 문제다. 유권자의 일부가 정보 부족이나 제도적 장벽으로 인해 사실상 선거 과정에서 배제된다면 민주주의 역시 온전하다고 보기 어렵다.
현재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장애인 관련 기관을 중심으로 선거교육이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사업 규모는 제한적이다. 선거가 임박해서 일회성으로 실시되는 교육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애인 평생교육 체계 안에서 지속적인 시민교육과 참정권 교육이 함께 이뤄질 필요가 있다.
또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지방선거관리위원회는 쉬운 공약 자료와 그림·영상 기반 선거정보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 정당과 후보자들 역시 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접근 가능한 선거 홍보물 제작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장애인의 한 표는 결코 특별한 표가 아니다. 다른 모든 시민의 한 표와 같은 가치를 지닌 소중한 권리다. 선거 때마다 장애인 유권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고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참정권 보장의 출발점이다.
[칼럼]장애인의 관점이 직업이 되는 사회를 바란다
글쓴이 : 전지혜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장애인 활동가들이 지역사회에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모습<사진=사람사랑양천IL센터 제공>
누구에게나 일자리는 단지 생계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사회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며, 하루를 채우는 삶의 내용이자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이것은 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장애인을 일할 수 없는 자 또는 사회에서 부양받는 자가 아닌, 직업이 있고 세금을 내는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중요한 사회적 과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의 노동을 너무 좁은 기준으로 평가한다. 얼마나 빠르게 일하는가,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는가, 얼마나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가 같은 경제적 논리가 노동의 거의 유일한 잣대가 되어 있다. 이 기준 아래에서 장애인의 노동은 저평가되고, 장애인의 삶은 시민의 권리보다는 지원과 보호의 대상으로만 머물기 쉽다. 하지만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가 오직 시장의 효율과 생산성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효율이나 생산성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를 보다 가치있게 만드는 일이라면, 이는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의 활동은 그 자체로 사회를 더 낫게 만드는 공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장애인이 집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그동안 이런 활동은 흔히 취미나 재활 프로그램의 일부 정도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그 시와 그림이 지역사회 안에서 전시되고, 학교나 기업, 공공기관의 공간에 소개되어 사람들에게 새로운 감수성과 이해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 활동을 넘어선다. 누군가의 표현이 공동체의 감수성을 넓히고 공간의 의미를 바꾸며,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데 기여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사회적 가치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속적인 시스템 안에서 운영되고 정당한 보상으로 이어진다면, 그 활동은 충분히 직업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장애인의 관점은 예술 활동에만 머물지 않는다. 장애인은 일상 속에서 누구보다 먼저 지역사회의 불편과 배제를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휠체어가 지나갈 수 없는 인도, 경사가 너무 가파른 보행로, 점자나 안내표지가 부족한 공공시설, 진입이 어려운 동네 시장과 마트, 이용이 불편한 산책로와 등산로는 비장애인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눈에는 그것이 곧 삶의 제약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관점을 사회적으로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를 들어 장애친화적이지 않은 지역사회를 직접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애인이 지역의 보행환경, 공공시설, 상점, 전통시장, 마트, 공원, 산책로, 등산로 등을 살펴보고 무엇이 불편한지,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환경개선단과 같은 형태로 참여해 실제 개선 방향을 제안하고, 변화된 환경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확인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런 활동은 단지 장애인만을 위한 일이 아니다. 노인, 어린이, 임산부, 일시적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더 많은 시민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환경을 만든다. 결국 장애인의 관점은 사회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살기 좋게 만드는 공공 자산인 셈이다.
이미 장애인의 특화된 사회적 기여에 초점을 두고 장애인 권리형 일자리 사업 또는 맞춤형 사업 등이 계획되고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계이다. 2025년 기준 인천형 중증장애인 맞춤형 일자리는 70명 규모에 그쳤다. 한 개 자치구에 많아야 7개의 권리형 일자리가 주어지는 현실이라면, 이는 장애인을 여전히 지역에 기여하는 사람이 아닌 보호수당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필요한 것은 선의나 일시적 지원이 아니라 제도적 설계다. 장애인의 사회적 기여를 직업으로 만드는 일은 지자체와 정부의 몫이다. 지자체와 정부는 장애인의 다양한 활동을 공공사업으로 조직해야 한다. 예술 활동의 결과물을 학교, 기업, 공공기관과 연결해 정기적인 전시와 보상 체계를 만들 수 있다. 동시에 지역사회 접근성을 점검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하는 모니터링단, 환경개선단, 지역의 장애친화 평가단과 같은 일자리도 충분히 설계할 수 있다. 장애인 접근성 보장을 위해 키오스크 모니터링단이나 선거 모니터링단도 가능하다. 장애인의 경험과 관점을 사회에 필요한 전문성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안정적인 소득과 연결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자리 정책이다.
이제는 직업의 기준을 다시 물어야 한다. 기업의 이윤에 직접 기여해야만 직업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공간을 더 포용적으로 바꾸며, 사회의 감수성과 공공성을 넓히는 일도 직업으로 인정할 것인가. 장애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모든 활동은 이미 사회적 가치다. 장애인 단체의 권익옹화 활동으로만 바라보지말고,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정당한 보상과 안정된 구조를 갖춘 일자리로 사업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장애인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꾸는 일, 장애인 권리운동의 새로운 형태는 장애인의 일자리로 국가의 공공성이 앞장서서 열어가길 바란다.
전지혜 교수는 장애학자로서 장애와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고, 장애인 정책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체장애인으로서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장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장애인개발원 부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표 저서로는 수다떠는 장애(울력출판)가 있으며, 장애정책 관련 연구를 다수 수행하고 있다.
[에세이] 이루어지는 소원의 비밀
제19회 장애인문학제 대상 수상 작가 ‘나다’
<사진= AI Gemini 생성 이미지>
이른 아침, 갑작스럽게 아이와 나, 남편 세 가족은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나 미래를 대비하며 하루하루를 계획하며 살아왔던 내가, 그 어떤 여행 일정도 세우지 않은 채 제주도 여행을 떠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르륵 잠이 쏟아질 것 같은 기내의 고요한 공기 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흰 구름을 보았다. ‘아…. 정말.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고, 다사다난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지던 순간, “엄마?” 하고 아이가 미소를 보이더니, “졸려요.”라고 말하곤 두 눈을 감았다. 그래, 그래도 잘 자라고 있어. 아이의 미소에 나는 조금 안도했다.
아이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 병원에서 처음 자폐 진단을 받던 날은 정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아이는 다섯 살이 되어 가도록 ‘엄마’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마치 다리를 얻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처럼.’
커다랗게 보름달이 뜬 밤이면 창문을 통해 새어 나온 달빛의 빛줄기를 따라서 인어가 달빛 아래에서 춤추듯 폴짝폴짝 뛰었다. 달빛을 두 손에 주워 담으려는 듯 짝짝 박수를 치며 침대 위를 돌아다녔다. 캄캄한 밤이면 예민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자폐 아이가 빛을 쫓아 반복적으로 보이는 상동행동이었다. 아이의 그런 모습을 동화 속 인어공주의 춤처럼 바라볼지, 공포 영화 속 자의식을 잃은 몽유병 환자의 위태로운 모습으로 볼지는 오로지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인 나의 몫이었다.
아이의 장애를 짊어진 남편과 나는 더 이상 쾌적한 30평대 아파트에서 잠드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혼 때 꿈이었던 아파트를 팔고 낡은 빌라로 이사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며 재활치료에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아이가 잘 클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서였을까. 종일 아이를 치료실에 데리고 다니며 뒷바라지하느라 지쳐서였을까. 낡은 빌라로 이사해서 집은 좁아졌지만,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밤이면 그대로 쓰러져 두 발 쭉 뻗고 잠들었다. 이사한 새집은 달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아이가 밤마다 빛을 따라 춤추던 일도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온 힘을 다해 치료에 집중해도 아이는 여전히 ‘엄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정말 우울했다. 그렇게 슬픔의 땅굴을 점점 깊게 파내려가던 어느 날, 뉴스를 통해 간절히 소원을 빌면 일생에 꼭 한 번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절이 땅끝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겨울,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족을 데리고 그 절로 향했다. 나는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종교의 경계를 내려놓고 남편과 함께 소원초를 샀다. 우리는 초에 불을 켜고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우리 아이가 엄마라고 말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 아이가 말 좀 할 수 있게 정말 정말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궁금합니다. 부처님, 신령님, 옥황상제님… 제발 하늘의 온갖 신이시여 우리 아이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세요. 간절히 빕니다.”
나는 부처님 불상 앞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다음 해, 코스모스가 예쁘게 피어 하늘하늘 춤추는 가을, 아이와 공원 산책을 하던 어느 오후에 이루어졌다.
“엄마!”
해질녘 저물어가는 햇빛이 우리를 비췄다. 코스모스 꽃밭에 키가 커져서 나란히 누워 있는 우리의 그림자. 나보다 작은 아이의 그림자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 아이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졌다.
<사진= 작가 나다 제공>
“엄마!” 비행기에서 곤히 잠들었던 아이가 깨서 나를 불렀다. 이젠 아이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소원을 잘못 빌었나 보다. 그냥 그때 아이의 자폐증이 낫게 해달라고 할 걸. 아이의 장애가 사라지게, 평범한 아이로 자라게 해달라고 빌 걸. 아이는 내 마음도 모른 채 여전히 나를 보며 해맑게 웃는다.
“엄마, 루나폴! 루나폴! 가고 싶어요.” “알겠어. 엄마가 꼭 데려갈게.”
루나폴은 예쁜 밤 산책로와 커다란 달 조형물로 유명한 제주도의 관광지다. 아이는 제주도 여행 전부터 유난히 커다란 달이 있는 루나폴에 가고 싶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씩 비가 뚝뚝 떨어졌다. 비가 왔지만 우리는 그대로 루나폴을 즐기기로 했다. 우비를 사서 입었다. 아이는 장애인 복지카드가 있어 입장료를 할인받을 수 있었다. 그래, 입장료도 할인받고… 이런 건 또 좋은 점이지. 입구를 지나 더 안으로 들어가자 환하게 빛나는 커다란 달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루나폴 샵에서 빨간색, 노란색, 민트색 조명 목걸이를 세 개 샀다. 조명을 켜면 알록달록 색이 너무 예뻤다.
“여보. 저기 루나폴 입구에 말이야. 커다랗게 있는 달이 왜 있는 건 줄 알아?” “그냥 관광 사진 찍으라고 있는 거겠지.” “에휴, 그 말도 맞긴 하지, 하하. 근데 그거 말고… 많은 사람들이 밤마다 달을 향해 소원을 빌었대. 그래서 소원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날, 쿵! 저기 떨어졌대. 소원을 잔뜩 품은 달이 너무 무거워져서 지구에 떨어진 거야.” “우리가 소원초에 태워 보냈던 소원만 해도 무게가 상당할걸.” “오늘은 루나폴 걷는 내내 소원 빌자.” “아니야… 난 이제 소원 안 빌어도 괜찮아. 다 이뤄졌어.” “여보, 소원이 뭔데?” “그냥 우리 가족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거… 그거면 돼.”
남편은 더 이상 나처럼 아이가 말할 수 있게 해달라거나, 자폐증을 완치해달라는 소원은 빌지 않는다. 남편의 소원을 듣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게 무슨 소원이야… 소원은 원래 거창해야 하는 거야… 난 그런 소박한 소원 싫어…” “이 정도면 행복한 거지 뭐…” “싫어… 난 아이가 더 컸으면 좋겠어. 어른이 되었을 땐 내가 기댈 만큼 든든한 어른으로 자라줬으면 좋겠어. 지금 모습으로만 자라는 건 싫어. 엄마라고만 말할 줄 아는 것도 싫단 말이야. 그럴까 봐… 무서워.” “알겠어. 그럼 여보는 오늘 또 소원 빌어.” “이제 여보도 내 소원 아니까 걷는 내내 같이 소원 빌어줘.” “알겠어. 나도 같은 마음이지 뭐…”
우리는 구불구불 반짝이는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밤의 루나폴은 정말 아름다웠다. 모든 소원을 품고 있는 듯, 밤인데도 포근하고 따뜻했다. 아이의 목에 걸린 노란색 조명 목걸이가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마치 아이가 어렸을 때 밤새 박수를 치며 붙잡으려고 했던 달빛이 목에 걸려 다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원을 빌고 또 빌며, 마지막 아주 커다란 달 앞에 섰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소원이 정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내 소원대로 엄마 아빠보다 열 배나 큰 모습으로 나타났다.
“거인이다!” 나는 아이 앞에서 아주 작은 어른이 되었다.
달 앞에는 조명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아이가 그 앞에 서자 그림자가 거인처럼 커져 보였다. 코스모스 꽃밭에서 나를 안아주던 작은 그림자의 아이가 거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이번 소원도 루나폴에서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아이는 듬직한 어른으로 잘 자랄 것이다. 비로소 나도 남편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더 이상 아이의 자폐증이 완치되게 해달라는 소원은 빌지 않을 것이다.
[칼럼] 2026 노동 대전환, 장애가 ‘결점’이 아닌 ‘특성’이 되는 시대
제42회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가 기량을 펼치고 있다. <사진=한국장애인고용공단>
[이혜연 더불어민주당 장애인위원회 부위원장] 최근 우리나라의 고용 지표는 겉보기에 안정적인 듯하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구조적 불균형이라는 민낯이 드러난다. 비장애인 노동시장에서도 단순 사무직이나 중간 수준의 숙련도가 필요한 일자리들은 AI와 자동화 시스템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로 인해 노동의 양극화는 더욱 깊어지고 있으며, 비장애인 근로자들조차 끊임없는 ‘재교육(Reskilling)’ 없이는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장애인 고용 시장에 더욱 가혹한 질문을 던진다. 비장애인조차 기계와 경쟁하며 생존을 고민하는 시대에, 그간 단순 반복 업무나 환경 미화 등 소위 ‘보호된 일자리’에 머물러온 장애인 노동의 자리는 어디인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위기는 새로운 기회의 문이되기도 한다. 기술은 더 이상 장애인을 소외시키는 벽이 아니다. 오히려 AI와 자동화 시스템은 신체적·정신적 제약을 보충함으로써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출발선에서 경쟁하게 돕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예술과 체육이 ‘직업’이 되는 새로운 순환 구조의 정착
그동안의 장애인 고용 정책은 단순히 ‘자리에 앉히는’ 양적 팽창에 치중해 왔고, 정부의 추계 방향 역시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자립은 자신의 재능이 전문가로 인정받고, 그 결과물이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는 ‘효능감’을 느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장애인 예술인 및 체육인의 직업성 보장’ 모델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장애인의 문화·예술·체육 활동이 복지 차원의 취미나 ‘재활 치료’의 영역이었다면, 이제는 이를 기업 고용과 직접 연계하여 ‘예술이 곧 직업’이 되는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현재 몇몇 기업이 장애 예술인을 직접 고용해 사내 문화를 풍성하게 하거나 제품 디자인에 참여시키고, 장애 체육인을 고용해 선수단을 운영하는 것은 기존에 인식되던 단순한 사회공헌을 넘어 기업의 ESG 가치를 높이는 길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업에는 고용 의무 이행의 기회를, 장애인에게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직업적 존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대면 직업군의 발굴과 직업 다양성의 확보
디지털 전환 시대에 반드시 병행해야 할 과제는 ‘비대면·디지털 직업군의 적극적 발굴’이다. 과거의 일터는 대면 소통과 물리적 이동 능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했기에 많은 장애인에게 문턱이 높았다. 그러나 이제 시공간의 제약을 허무는 디지털 기반의 일자리가 그 대안이 되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발달장애인들이 참여하며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일부 기업의 AI 학습 데이터 레이블링부터 정보 보안 관제, 메타버스 콘텐츠 크리에이터, 온라인 튜터링까지 그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물리적 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디지털 일터에서 장애는 더 이상 결점이 되지 않는다. 획일화된 단순직무에서 벗어나 IT, 연구직 등 고부가가치 산업군으로 발굴하고 고용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이다. 기업들 또한 기존의 업무를 쪼개어 장애인에게 적합한 비대면 직무로 재설계하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장애 학생 교육과정의 근본적 변화와 미래 준비
결국 기술을 도구 삼아 일터로 나아가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미래 일자리가 요구하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장애학생의 진로탐색과 교육을 담당하는 특수교육 현장부터 바뀌어야 한다. 기초적인 사회 적응 교육에 머물러 있는 현재의 교육과정을 산업 현장의 속도와 다양화에 맞춰 전면 개편해야 한다.
모든 장애 학생이 AI와 데이터를 다루는 디지털 리터러시를 익혀 기술로부터 소외되지 않도록 돕고, 학령기 초기부터 예술적·기술적 적성을 정밀하게 진단하여 맞춤형 진로 트랙을 제공해야 한다. 학교와 기업, 일자리 플랫폼이 손을 잡고 산업 현장의 로봇과 소프트웨어를 미리 경험하는 ‘실전형 교육’이 상시화되어야 한다. 교육의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기술의 발전도 일자리의 다양성도 결국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의 도약
장애인 일자리 문제는 더 이상 연민이나 의무감으로 풀 숙제로 인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소중한 인적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고도로 발전한 기술의 혜택을 어떻게 보편적 인권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결단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비장애인의 일자리가 기술에 의해 위협받는 이 시대는, 역설적으로 장애인이 각자의 능력과 기술을 도구 삼아 대등하게 기여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운동장이 될 수 있음을 기대하게 한다. 수혜적 일자리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예술이 직업이 되며, 디지털 기술이 장벽을 허무는 사회.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장애인은 우리 경제의 당당한 주체이자 미래 기술 시대의 좋은 인력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고용 수치를 넘어, 한 인간의 ‘직업적 존엄’이 실현되는 진정한 포용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혁신적 자립, 포용적 미래를 향한 담대한 여정
결국 장애인 고용의 패러다임 전환은 우리 사회가 ‘장애’를 정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일에서 시작된다. 장애는 극복해야 할 결핍이 아니라, 적절한 기술과 환경이 뒷받침될 때 사회의 다양성을 풍요롭게 만드는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장애인에게 어떤 일자리를 줄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술과 시스템이 장애인의 잠재력을 온전히 담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정부는 기존 수치 중심의 고용률 지표에서 벗어나, 예술과 디지털 등 고부가가치 직군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을 공고히 해야 한다. 또한, 형식적 고용 부담금이 아닌 적극적인 고용에 대한 기업 인센티브를 고려해야 한다.
기업은 고용 부담금을 피하기 위한 수동적 채용을 넘어, 장애인의 역량을 통해 ESG 경영의 실질적 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파트너십을 구축함으로써 사회연대를 실현하는데 기업의 공적기여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특수교육 현장은 아이들이 기술의 물결 위에서 당당히 항해할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인 디지털·예술 통합 교육의 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2026년, 기술 대전환의 파고는 장애인에게 위기가 아닌 ‘공정한 운동장’으로 ‘참여의 장’으로,보살핌의 대상에 머물던 장애인이 디지털 세계의 창작자로, 기업의 핵심 인재로, 당당한 예술가로 서는 모습은 더 이상 먼 미래의 풍경이 아닐 것이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기술로 허물어지고, 모든 개인이 저마다의 쓸모를 증명하며 존엄하게 일하는 사회. 그 포용적 미래가 바로 지금, 우리의 인식 전환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