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피해 증명 못 하는 절대적 약자에 위법성 예외 인정해야”…대법원에 전향적 판단 요구

발달장애인과 치매 노인 등 스스로 피해를 증명할 수 없는 학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3자 녹음의 증거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제1회 장애인학대예방의 날인 6월 22일, 전국장애인부모연대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10개 장애인 단체로 구성된 ‘제3자 녹음금지 예외적용을 통한 학대피해 장애인 권리보장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3자 녹음의 위법성 예외 인정을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의 계기가 된 것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이다. 웹툰작가 주호민씨의 아내이자 자폐성 장애아동의 부모인 한우리씨는 2022년 9월 경기 용인의 한 초등학교에서 특수교사 A씨가 아들에게 “버릇이 매우 고약하다”, “너 싫다고, 나도 너 싫어, 정말 싫어”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아이 가방에 넣어둔 녹음기로 포착했다. 이 녹음파일을 근거로 A씨는 아동학대와 장애인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1심 법원은 장애아동이 스스로 학대에 방어하기 어려운 점, 녹음을 통해 보호할 수 있는 이익이 더 크다는 점을 들어 녹음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A씨 발언을 정서적 학대로 판단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해당 녹음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며 증거능력을 부정했고,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는 행위를 금지하며, 이를 위반해 수집한 증거는 재판에 쓸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건을 겪으며 모진 일을 당해도 스스로 말로 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보호자가 구체적인 학대 정황을 발견했을 때 남긴 녹음이 발달장애인과 영유아, 치매 노인을 지킬 방법”이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2024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장애인 학대 피해가 6,031건이었으며, 그 가운데 70%가 스스로 의사 표현과 자기방어를 전혀 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이라고 밝혔다. 학대를 당해도 이를 말로 표현하거나 증거를 직접 남길 수 없는 이들에게 보호자의 녹음은 사실상 유일한 피해 입증 수단이라는 것이다. 대책위는 “자기방어를 전혀 할 수 없는 학대 피해자에게 획일적 증거 배제는 또 다른 차별”이라며 “장애인차별금지법과 UN 장애인권리협약 정신에 반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에는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직접 참석해 연대 발언을 했다. 김 의원은 “대법원 판단은 피해자 권리 보호의 기준이 될지, 마지막 보호 수단을 빼앗을지 결정할 기로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지난해 학대 입증을 위한 정당한 목적이 인정될 경우 제3자 녹음을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내용의 통신비밀보호법 등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이 사안에 목소리를 보탰다. 나 의원은 “학대 피해 장애인의 70%가 의사 표현을 스스로 할 수 없는 이들인데, 부모 등 제3자의 녹음마저 위법수집증거로 배척한다면 그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스스로 피해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절대적 약자의 경우, 제3자 녹음의 증거능력을 폭넓게 인정하는 위법성의 예외가 인정되어야 한다”며 대법원의 전향적 판단을 강력히 촉구했다.
법률가 112명도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해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학대 피해를 입기 쉬운 이들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에 관한 기준을 세우는 중대한 계기”라며 헌법에 부합하는 해석을 요청했다. 미국·영국·독일·일본 등 주요국에서는 학대 피해자가 자기방어가 어려운 경우 제3자 녹음의 증거능력을 사안별로 인정하거나 재량적 심사를 통해 허용하고 있다.
대책위는 이번 1차 집회를 시작으로 국제단체 의견서 제출, 국회 입법 토론회 추진 등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