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의뢰 보고서 “지원 악화 근거 충분…개혁 중단하고 실태 연구 먼저 해야”

영국에는 장애인이 직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가 비용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다. 수어 통역사를 고용하거나 이동용 택시를 타는 데 드는 돈을 보조해주는 식이다. ‘일하는 데 필요한 지원(Access to Work·이하 AtW)’이라는 이름의 이 제도를 두고 요즘 영국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영국 정부가 조용히 지원 기준을 강화하고 금액을 줄이고 있는데, 그에 따른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조사한 데이터가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근 사회정책 연구·캠페인을 무료로 지원하는 학술 연구팀 무브먼트 리서치 유닛(MRU)이 발표한 보고서에는 정부에 대한 두 가지 요구가 담겨있다. 지금 당장 진행 중인 제도 개편을 멈추고, 이 제도가 장애인의 삶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제대로 연구하라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는 ‘일하는 데 필요한 지원 변경 반대 캠페인’이 의뢰해 올해 초 작성됐다. 이 캠페인은 약 10년 전 보수당 정부 시절에도 AtW 축소에 맞서 싸운 단체다. 당시 공론화를 이끄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고, 지금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판단 아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MRU는 AtW가 장애인의 고용 유지, 소득 안정,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됐다며 특히 일부 연구에서는 이 지원이 없으면 계속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이 상당수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문제는 정부가 장애인 고용 지원을 줄였을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생기는 지 수치로 보여줄 관련 데이터를 충분히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지원을 신청해도 처리가 늦어지고, 심사는 형식적이며, 어떤 기준으로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지도 불투명하는 등 체감 경험도 나빠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어도 결국 포기하고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
보고서의 주요 권고 사항은 세 가지다. 먼저, 정부가 AtW를 받은 장애인 집단과 유사한 장애를 가졌지만 지원을 받지 못한 대조군을 비교하는 방식의 효과 평가 연구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AtW가 없어질 경우 잃게 될 소득세 규모를 산출해 비용·편익 분석을 수행할 것도 요구했다. 아울러 충분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떠한 제도 변경도 중단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보고서는 신청 처리 지연 단축과 담당자 교육 개선 등 제도 개선 요구도 담았다.
보고서는 “AtW가 장애인의 취업 유지에 미치는 전반적 효과에 대한 근거는 여전히 불충분하지만, 개인 차원의 경험이 최근 수 년간 악화됐다는 근거는 충분하다”며 “정부가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캠페인 측은 이번 보고서가 AtW가 ‘필요 중심 서비스’에서 ‘비용 중심 서비스’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와 맞물려 이번 주 정부에 AtW의 필요 중심 원칙을 지켜달라는 청원도 시작됐다. 청원에는 최근의 제도 변화가 수급자로 하여금 “지원을 당연한 권리가 아닌 감사한 시혜로 여기게 만든다”고 적시됐다.
이번 캠페인을 지지하는 단체로는 장애인반긴축연대(DPAC), 영국수어통역사전국연합(NUBSLI), 장애인 주도 극단 그래에(Graeae) 등이 있다.
그래에의 공동 대표 겸 예술감독인 제니 실리는 본인도 AtW 지원 삭감을 직접 경험했다. 20년 넘게 AtW로 영국수어 통역 비용을 지원받아온 그는 지난해 영국 노동연금부(DWP)로부터 지원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DWP는 그래에가 사용자 차원의 조정을 할 수 있고, 실리가 “최소한의 필요 지원”에 의존해야 하며, AtW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그래에가 평등법상 합리적 조정의 일환으로 지원 비용의 부족분을 자체 충당해야 한다고도 했다.
2012년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 공동 예술감독을 맡기도 했던 실리는 공개 캠페인 끝에 지원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 주 “AtW를 둘러싼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지원 갱신을 신청했다가 이의 제기까지 기각당한 장애인 예술가들과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밝혔다. 한 시각장애인 작가의 경우 택시 이용 지원이 전액 삭감됐고, AtW 측은 연간 세금 신고 때 비용을 청구하면 된다고 안내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리는 “이는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며 “장애인과 그들과 함께 일하는 통역사·활동지원사·기록보조인 등 모두가 세금을 내는데, 이런 삭감은 경제적으로도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DPAC 공동 창립자 린다 버닙은 “이 보고서는 여러 연구 성과를 꼼꼼하게 통합한 결과물”이라며 “지원이 삭감되고 처리 기간마저 지연되는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AtW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연구를 직접 발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버닙은 키어 스타머 총리를 비롯한 노동당 인사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AtW가 제때 마련되지 않는다면 노동당, 특히 스타머 총리는 장애인을 필수 지원 없이 사회에서 내던지는 것에 만족한다고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고 비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