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러→QA 전환에 나선 기업들, 보조공학으로서의 AI 가능성도 주목

AI 기술이 빠르게 일상을 바꾸는 사이, 장애인 고용 시장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기업들이 의무고용률을 채우는 수단으로 활용해 온 데이터 라벨링 직무가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무너지면서, 이 일자리에 기대온 중증·발달장애인 노동자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정부의 직업훈련 시스템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기업들은 고용 유지와 자동화 사이에서 갈림길에 서 있다. 본지는 3회에 걸쳐 장애인 고용 위기의 실체를 짚고, 기술 변화 속에서도 장애인 노동자가 도태되지 않을 길을 모색한다.[편집자주]
AI가 장애인의 일자리를 뺏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 데이터 라벨러를 ‘AI 품질 검수자(QA)’로 재교육하거나, AI 보조 툴을 도입해 중증장애인의 업무 영역을 넓힌 기업들은 “장애인 노동자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입을 모은다. 붕괴 위기에 놓인 라벨링 직무의 대안이 현장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AI 도입이 곧 해고로 이어진다는 통념과 달리, 기업 현장에서는 재교육을 우선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실시한 지역 기업 조사에 따르면, AI를 도입한 서비스업 기업의 34%와 제조업 기업의 20% 이상이 직원 해고 대신 재교육으로 대응했다고 답했다. 반면 AI 도입으로 인한 해고 비율은 서비스업 4%, 제조업 0%에 그쳤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이 발표한 2024~2034년 직업 전망에서도 데이터 과학자 33.5%, 정보보안 분석가 28.5% 등 AI·IT 관련 직종의 고용이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됐다. 단순 라벨링 직무가 저물어가는 자리를, 검수·품질관리 직무 수요가 대신 채울 수 있다는 구조적 근거인 셈이다.
다만 스탠퍼드대 디지털 이코노미 연구소 조사를 보면, AI 노출도가 높은 직종에서 경험 많은 근로자의 고용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어난 반면 22~25세 청년층 고용은 1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AI가 기존 직무를 통째로 대체하기보다, 신규 채용 경로 자체를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국내 데이터 라벨링 시장에서 신규 진입 통로가 막힌 장애인 구직자들의 처지와도 맞닿아 있다. 단기 계약이 끝난 뒤 재교육 기회 없이 시장 밖으로 밀려나느냐, 아니면 그 자리에서 다음 단계 직무로 옮겨 타느냐가 갈림길이라는 이야기다.
‘가품 탐지 AI 모델’의 정확도·재현율을 검증하는 IT 플랫폼 기업의 사례가 그 갈림길에서 재교육을 택한 경우다. 이 기업은 단순 이미지 태깅 업무를 하던 인력 가운데 일부를 골라, 정답 데이터셋 구축과 결과값 검수를 병행하는 QA 직무로 전환시켰다. 최초 1명으로 출발한 조직은 1년 만에 10명 규모로 늘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장애인 노동자다. 회사 관계자는 “네모를 치는 반복 작업만 하던 직원들이 AI가 낸 답의 정확도와 재현율을 따지는 지표를 직접 산출하게 되면서, 업무에 대한 몰입도와 책임감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전했다.
발달장애인 표준사업장으로 출발한 한 소셜벤처의 변화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 사업장은 이미지에 사각형을 그려 넣는 단순 바운딩 작업 위주로 발달장애인 직원들을 고용해왔다. 그러나 생성형 AI의 오토 라벨링이 확산되며 일감이 줄어들자, 직원들을 대상으로 AI가 생성한 결과물의 정확성과 윤리성을 평가하는 교육을 별도로 진행했다. 단계적으로 난이도를 낮춘 체크리스트와 반복 훈련을 병행한 결과, 일부 직원은 AI 산출물의 오류를 걸러내는 2차 검수 업무까지 맡을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직무 전환이 효과를 내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AI 도구 자체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기업 EY 조사에서 자폐·ADHD 등 신경다양성 근로자의 85%는 생성형 AI가 더 포용적인 직장 환경을 만든다고 답했다. 91%는 AI를 일종의 보조기술로 인식했고, 76%는 AI가 실제 직무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 연구에서도 신경다양성 근로자의 AI 어시스턴트 만족도는 신경전형 근로자보다 25%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AI가 초안 작성(72%), 생각 구조화(61%), 오류 식별(56%) 등에서 업무 장벽을 낮춰준다고 평가했다.
AI는 직무를 빼앗는 기술이자 동시에 장애를 보완하는 보조공학으로도 쓰이고 있다. 시각장애인은 화면의 이미지와 문서를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생성형 AI 도구를 활용해 문서 요약과 자료 정리 업무를 수행한다. 청각장애인은 실시간 음성 인식·자막 생성 기능을 활용해 회의 내용을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지체장애인 가운데는 AI 코딩 보조 도구를 활용해 손이나 손가락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도 개발·기획 업무를 비장애인과 동등한 속도로 처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한 지체장애인 IT 기획자는 “예전에는 문서 하나 작성하는 데도 시간이 배로 걸렸는데, AI 도구가 초안을 잡아주고 나서부터는 기획안을 검토하고 다듬는 본질적인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가 만족도 차원을 넘어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로 이어진다는 근거도 나왔다. 미국 국가경제연구소(NBER)가 중국의 한 배달 플랫폼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청각장애인 근로자에게 AI 음성 통화 시스템을 도입하자 지연 배달률과 부정적 고객 평가가 줄고 생산성은 늘었다. 비장애인 근로자와의 시간당 임금 격차는 3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됐고, 근로자의 수익성은 11% 증가했으며 이직률도 감소했다. AI 보조도구 도입이 장애인 근로자의 생산성을 비장애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기업의 수익성 개선으로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흐름은 해외 빅테크의 신경다양성 채용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팰런티어, SAP가 자폐 스펙트럼·ADHD 등 신경다양성 인재를 AI 시대 핵심 인력으로 재정의하고 채용·훈련 체계를 통째로 바꾼 것처럼, 국내 기업들 역시 ‘의무고용률을 채우는 인력’에서 ‘기술을 다루는 인력’으로 장애인 노동자를 재배치하는 실험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다만 이 같은 성공 사례는 아직 소수 선도 기업에 머물러 있고, 그 이면에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구조적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분석에 따르면 2025년 10월 기준 장애인 임금근로자의 66.4%가 비정규직으로, 전체 임금근로자 비정규직 비율(37.0%)의 1.8배에 달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전 세계 고용의 24%, 고소득 국가에서는 34%가 생성형 AI에 노출돼 있다고 추정하는데, 단순 반복 업무인 라벨링은 이 자동화 압력을 가장 먼저 받는 직종이다. 재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장애인 노동자가 다수인 현실에서, 앞선 성공 사례들은 아직 ‘예외’에 가깝다.
직무 전환에는 초기 교육 비용과 시간이 든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뉴욕 연준 조사에서 AI 도입 기업의 34%가 재교육을 택했다고 밝혔지만, 상당수 중소기업은 초기 교육 비용 부담으로 직무 전환 자체를 주저하고 있다고 답했다. 공단 통계를 보면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대기업의 장애인 고용률조차 2.65%로 민간기업 의무고용률(3.1%)에 미달하는 실정이다. 대규모 기업조차 직무 재설계에 나설 여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소 규모 사업장에 재교육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단순 고용률 충족을 넘어 직무 재설계, 이른바 ‘정당한 편의 제공’에 투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Y 조사에서 생성형 AI가 초안 작성 시간 단축(72%), 생각 구조화(61%), 오류 식별(56%)에 도움이 된다고 답한 비율이 높았던 것처럼, 교육 투자 대비 생산성 향상 효과는 이미 여러 수치로 확인되고 있다. AI는 장애인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동시에, 장애를 보완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 라벨링이 저물어가는 지금, 관건은 그 자리를 대체할 직무를 누가,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폭넓게 설계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