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물류 공정 분리한 ‘메디컬패커’ 모델, 장애인 고용의 새로운 기준 제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발간한 ‘2024년 직무개발사업 우수사례집’은 장애 적합 직무 부족이라는 구조적 과제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의 성과를 담고 있다. 선도기업 전략직종 직무개발, 현장 중심 직무개발, 중증장애인 고용모델 개발·확산사업 등에서 발굴된 13건의 우수 사례와 164건의 아이디어 공모 성과는 변화하는 산업환경 속에서 장애인 고용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본지는 해당 사례들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지속 가능한 직무 개발을 위한 과제와 개선 방향을 연속 기획을 통해 심층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편집자주]
국내 장애인 고용은 오랜 기간 콜센터, 환경미화, 단순 제조직 등 일부 직군에 집중돼 왔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 통계에 따르면 의무고용 대상 기업 중 상당수가 직접 고용 대신 고용부담금 납부를 선택하고 있으며, 채용이 이뤄지더라도 직무 다양성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 속에서 병원 물류 공정을 세분화해 장애인 직무로 재설계한 사례가 등장해 주목된다.
가톨릭대학교 부속병원의 운영 지원을 맡고 있는 ㈜평화아름은 최근 ‘메디컬패커(Medical Packer)’ 직무를 도입해 서울과 경기 지역 병원 현장에 적용했다. 해당 직무는 거즈, 붕대, 면봉 등 의료 소모품을 규격과 진료과 수요에 맞춰 분류·포장하는 업무로, 기존에는 간호사나 의료기사들이 진료 준비 과정에서 병행해왔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는 “진료 전 준비 과정에서 반복되는 소모품 분류와 확인 업무가 누적되면서 현장 부담이 적지 않았다”며 “전담 인력이 배치된 이후 준비 시간이 단축되고 업무 집중도가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부천 지역의 부천성모병원 역시 시범 도입 이후 동일 공정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 모델의 핵심은 ‘직무 분절(Job Carving)’이다. 의료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높은 정확성과 반복 숙련을 요구하는 공정을 별도 직무로 분리한 것이다. 직무 설계 과정에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직무지도원과 외부 컨설팅 기관이 참여해 작업 동선, 위생 기준, 멸균 확인 절차 등을 세부적으로 분석했다. 발달장애 근로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색상과 기호 중심의 매뉴얼을 제작했고, 작업대는 물품 혼입을 방지하도록 구획화했다.
현재 해당 직무에는 총 4명의 장애인 근로자가 투입돼 있다. 이들은 의료진이 사전에 입력한 수요 리스트에 따라 물품을 분류·패키징하고, 이중 확인 절차를 거쳐 공급한다. 병원 측은 내부 점검 결과, 도입 이전 대비 소모품 준비 시간이 평균 수십 분 단축됐다고 밝혔다. 간호사 1인당 준비 부담이 줄어들면서 환자 상담과 처치 준비에 투입 가능한 시간이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현장 간호사 A씨는 “단순 반복 업무가 줄어들면서 응급 상황 대응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 병원 감염관리팀은 “외부 인력이 의료 공간에 투입되는 만큼 위생과 안전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며 “정기 교육과 점검을 병행하지 않으면 모델이 지속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노동시장 전문가들은 이 사례를 ‘공유가치 창출(CSV)’ 관점에서 해석한다. 기업의 본업과 장애인 고용을 분리된 사회공헌 활동이 아닌 생산 공정의 일부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모든 병원에 동일하게 적용되기는 어렵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의료기관의 규모, 진료과 구성, 물류 시스템에 따라 직무 설계 방식이 달라져야 하며 초기 컨설팅 비용 부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 인력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보조 공정의 효율화는 병원 경영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보건의료계에 따르면 간호 인력의 이직률과 업무 과중 문제는 수년째 반복되고 있으며, 단순 보조 업무의 분산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메디컬패커 모델은 이러한 현장의 요구와 장애인 고용 확대라는 정책 과제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셈이다.
㈜평화아름은 향후 의료 폐기물 분류 보조, 외래 안내 지원 등으로 직무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직무 확장은 안전성 검증과 책임 소재 명확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 병원 측의 입장이다.
이번 사례는 장애인 고용을 단순 인원 충원의 문제가 아니라 직무 구조 재설계의 문제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의무고용 비율을 채우는 데 머무르지 않고, 실제 생산성과 서비스 질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여부가 향후 확산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장애인 고용 정책이 ‘몇 명을 채용했는가’에서 ‘어떤 직무를 만들었는가’로 전환될 수 있을지, 의료 현장에서 시작된 실험의 성과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