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촉각 표준과 영국 ‘조용한 모드’에서 알 수 있는 것들

자동화는 효율의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을 재편했다. 은행 창구 대신 ATM기가 늘고, 매장엔 주문용 키오스크가, 역엔 발권기가 줄지어 있다. 이제 인간은 ‘기계 앞의 사용자’로 존재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변화는 아니다. 화면의 높이, 글자의 크기, 안내음의 속도, 메뉴의 깊이 하나까지가 새로운 경계가 된다. 장애인·노인·비숙련 이용자는 기술의 중심에서 다시 주변으로 밀려난다. ‘스마트’라는 이름의 혁신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깥에 세워두는가. ‘배리어프리 인터페이스를 묻다’는 해외 사례를 통해 미국의 맥도날드, 영국의 런던교통공사, 독일의 베를린교통공사 등 해외 사례를 통해 ‘접근성은 왜 첫 화면이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쉬운 언어와 되돌리기 같은 인지 친화적 인터랙션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접근성을 기술이 아닌 제도, 즉 조달 기준으로 끌어올린 국가들의 변화를 추적한다. 자동화의 시대, 기계의 설계는 결국 사회의 태도를 닮는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화면을 만들고 있는가. [편집자주]
디지털 기기에서 버튼을 줄이는 것만으로 이용이 쉬워지지는 않는다. 사용자가 느끼는 복잡함은 물리적 조작보다 머릿속 계산량에서 비롯된다. 쉽고 짧은 언어, 최소한의 단계, 실수를 되돌릴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한 이유다.
사용자는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질 때, 낯선 용어나 복잡한 절차를 마주할 때 쉽게 피로를 느낀다. 실수 후 되돌리기 기능이 없거나, 소음·시각 자극이 많은 환경에서 판단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세계 각국의 공공 시스템과 민간 서비스는 이런 인지 부담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쉬운 언어는 사용자의 피로도를 가장 빠르게 낮춘다. 영국 런던교통공사(TfL)는 쉬운 영어(Plain English)를 적용해 티켓 종류를 ‘지역·시간·할인’으로 나눠 카드화했다. 독일 베를린교통공사(BVG) 역시 쉬운 독일어(Einfache Sprache) 모드로 전문 용어 대신 픽토그램과 짧은 문장 중심으로 구성했다. 문장을 12~16단어 이내로 줄이고 ‘발권’ 대신 ‘표 사기’, ‘인증’ 대신 ‘확인하기’처럼 일상의 언어로 바꾸는 식이다. TfL에 따르면 단축된 문장 구조로 사용자의 읽기 시간이 30~40% 감소했다.
키오스크의 선택 단계 축소는 사용자의 기억 부담과 더불어 사용 시간을 줄인다. 맥도날드는 접근성 모드에서 주문 단계를 일반 대비 25% 줄여 피크타임 병목을 완화했다. 자주 쓰는 조합은 ‘바로 구매’ 버튼으로 만들어 제시하고, 알레르기 정보 등은 접어 둬 흐름을 끊지 않는다. 뉴질랜드의 공공기관은 ‘한 화면에 한 결정’ 원칙을 도입해 불필요한 화면 이동을 줄였다.
되돌리기 기능은 실수의 비용을 낮춘다. BVG는 되돌리기 버튼을 화면 왼쪽 아래에 고정해 재시도율을 높였다. 미국의 파네라 브레드도 되돌리기·취소 버튼을 항상 같은 위치에 배치해 오조작 후 이탈률을 낮췄다. 실수를 수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사용자의 긴장을 줄이고, 전체를 취소하고 다시 주문을 해야하는 번거로움을 없앤다.
일본은 촉각 표준으로 접근성을 확장하고 있다. 홈·확인·취소 버튼에는 서로 다른 돌출 패턴을 적용하고, 이어폰 잭 주변에 점자 라벨을 붙였다. 시각 의존도를 낮추고 손가락 감각으로 위치를 학습하게 해 오조작에 대한 불안을 덜어준다.
영국은 혼잡한 환경에서 인지적 피로를 줄이기 위해 ‘조용한 모드’를 제공한다. 소리 알림 대신 진동과 고대비 시각 효과로 알려주고 텍스트와 색상 정보를 단순화 했다. TfL 셀프 발권기와 테스코 셀프 체크아웃 단말기에서는 ‘사운드 레벨 낮추기’ 토글이 기본으로 제공된다.
화면 이동수가 줄면 기억해야 할 단계가 줄고, 되돌리기가 보이면 선택은 과감해진다. 감각의 자극을 낮출수록 판단은 명료해진다. 인지 부담을 줄이는 설계는 사용자 편의 뿐 아니라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넓히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장애인 고용 현장에서는 정보의 해석·판단·기억 과정이 높은 부담으로 작용해 직무 지속성을 낮추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장애인 일자리 확대의 관건은 물리적 편의보다 인지적 편의”라고 지적했다. 화면의 명도나 버튼 크기로 나타나고는 있지만,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기 쉬운 상태로 제공하느냐가 고용 유지율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