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앞에 가장 먼저 쓰러진 이들…5·18 장애 피해자 기록은 지금도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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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한 죄로 가장 먼저 쓰러져…5·18 최초 희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상설전시실 <사진=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1980년 5월 18일, 광주 시내에는 봄볕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날도 한 청년이 평범하게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들을 수 없었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를 가장 먼저 죽음으로 몰았다. 5·18 민주화운동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 청각·언어장애인 김경철 씨 이야기다.

김경철 씨는 1952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질병으로 청각을 잃었고, 언어장애까지 갖게 됐다. 그는 구두를 닦고 수선하며 생계를 꾸렸다. 1980년 5월 18일, 그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날은 딸 혜정이의 백일잔치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고, 잔치가 끝난 뒤 그는 귀가하는 친척을 배웅하러 광주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으로 나섰다.

그때 계엄군 공수부대원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함께 있던 지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하지만 김 씨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지 못한 채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혔다.

부대원들은 심문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들을 수 없었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수부대원들은 이를 반항 혹은 시위대의 묵비권으로 판단했다. 군화와 진압봉이 그의 몸을 향했다. 살려달라는 손짓을, 들을 수 없다는 몸짓을, 부대원들은 더 거센 폭행으로 돌려보냈다.

5월 18일 밤,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그를 공수부대원들이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이튿날인 5월 19일 새벽 3시, 김경철 씨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군통합병원 검시기록에 남아 있다. 기록에는 사인이 ‘타박사’로 적혀 있다.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건조한 의학 용어들이 나열돼 있지만, 그 안에는 한 인간이 겪은 참혹한 최후가 담겨 있다.

5·18 기록물에는 김경철 씨만이 아니다. ‘피해자 보상 신청 서류 및 의학적 검사 기록’에는 계엄군의 총격, 대검 자상, 고문과 폭행으로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 수많은 시민들의 기록이 포함돼 있다. 신체 장애뿐 아니라 고문 후유증으로 피해망상과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게 된 이들의 진단서와 진술서도 광주광역시청 등이 소장한 약 69만 페이지의 보상 관련 기록물 속에 함께 남아 있다.

5·18이 남긴 상처는 1980년 5월에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장애는 이후의 삶 전체를 짓눌렀다.

김경철 씨의 이야기는 5·18이 민주화운동의 역사뿐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사회의 가장 약한 자리에 있던 이들이 국가폭력에 가장 먼저 노출됐음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매년 5월이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장애인 인권 단체들이 광주를 찾는다. 고 김경철 열사를 추모하며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민주주의”를 외친다.

1980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장애인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무고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그런 상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그 무지와 잔인함이 스물네 살 청각장애인 청년의 목숨을 가장 먼저 앗아갔다는 사실은, 지금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민낯이다.

딸 혜정이의 백일잔치를 치른 그날 저녁,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