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회 전국장애인문학제 대상 수상작가 ‘나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장애 판정을 받고 나면, 정상 발달을 하는 평범한 아이들을 함께 만나는 게 눈치 보이고 어색해지는 시점이 온다. 특히나 함께 놀기 위해 다 같이 모였는데 텐트럼(감정이나 욕구를 적절히 표현하지 못해 격하게 분출하는 상태)이라도 발생하는 날에는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때부터 부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다양한 치료에 관심을 쏟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한참 관계에 위축되어 있던 시절, 나는 나에게 무척 호의적이고 친절했던 한 다단계 판매원 아줌마에게 마음을 많이 열게 되었다.
그분은 어떻게든 고객을 유치해야 했고,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자폐라는 장애를 가진 내 아이의 상황은 회사의 상품을 홍보하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손쉽게 그분의 타깃이 되었다.
외출해서 타인과 함께할 때면 늘 긴장 속에서 마주해야 했던 아이의 텐트럼과 민망한 실수들. 이상하게도 다단계 영업을 하는 그분을 만날 때만큼은 긴장이 풀어졌다. 내가 ‘지인을 빙자한 잠재적 고객’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내 상황의 어려움과 고충을 그분 앞에서는 편안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그 다단계 아줌마를 대체 왜 만나는 것이냐며 나를 비난했다.
“그 아줌마는 물건 팔려고 당신 만나는 거잖아. 그냥 당신이 좋아서 만나겠어?”
날 선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묻어둔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장애가 있는 우리를 누가 좋아할 건데? 누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할 건데!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면 어때, 우리한테 친절하잖아. 우리한테 관심 가져 주잖아. 그게 뭐가 나쁜 건데! 당신마저도 우리랑 시간 보내는 걸 힘들어하면서!”
나는 아줌마의 관심이 영업을 위한 친절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 관계를 놓지 못했다.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유산균과 영양제를 구입하고, 앞으로의 막막함을 토로하며 위로를 받았다. 돈으로 산 다정함일지라도 내겐 절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배변 실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옷을 들고 급히 학교로 향했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었지만, 내 아이는 운동장 의자 앞에 쭈그려 앉아 홀로 손으로 흙을 파고 있었다.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아이는 이내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 한켠이 저릿했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아이에겐 친구가 없었다. 말을 잘 못 하니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규칙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게임에 끼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래들 틈에서 아이가 감당했을 고독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는 혼자 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다른 연락이 왔다. 학교폭력에 관한 안내 전화였다. 옆 반 남자아이가 어깨를 밀치며 아이를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널 괴롭히는 친구는 무조건 피하라고 몇 번이고 단단히 일렀다.
아이는 알겠다고 답했지만, 정작 방으로 들어가 그 친구의 이름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심지어 자신의 노트에 그 아이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다. 미움인지 반가움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기호였다. 어떤 감정이길래 친구의 이름을 문신처럼 마음에 새겨 넣듯 적었던 걸까.
당황스러운 것은 그다음 아이의 반응이었다. 아이는 그 친구를 피하기는커녕 쉬는 시간만 되면 옆 반까지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고 놀리는 것조차 친근한 ‘관심’의 표현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매일 혼자였던 아이에게는 그 관심이 다정했는지 거칠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주고, 반응해 주는 것만으로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던 것은 아닐까. 결국 그 친구가 매일 찾아오는 아이를 부담스러워해 선생님께 불편함을 호소하고서야 이 슬픈 엇갈림은 끝이 났다.
엄마인 나조차도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이 두려워 자본주의적 친절에 마음을 의지했는데, 매일 혼자였던 아이라고 무엇이 달랐을까. 방식이 어떠했든, 누군가 자신을 봐주는 그 순간만큼은 아이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어쩌면 사람은 관심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따뜻한 관심이라면 더없이 좋겠지만,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때로 그 관심의 모양까지 가려낼 여유를 잃는다. 나도 그랬고, 아이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와 함께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는 건강한 관심을 알아보는 법’을 천천히 배워가고 싶다. 그러니 관심과 친절에 쉽게 약해지는 우리에게 바보 같다고 이야기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그저, 너무 외로웠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