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속옷 빨래로 시작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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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회 전국장애인문학제 대상 수상작가 ‘나다(필명)’

<사진=AI Gemini 생성 이미지>

“한강이네, 한강이야.” 밤새 아이의 소변을 잔뜩 머금은 이불은 노란색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아이의 기저귀를 떼기 위해 속옷를 입히지 않고 재우기 시작한 날부터 아이는 밤새 이불에 시원하게 실례를 해 놓았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지만 손짓 몸짓 표정까지 총동원해 아이에게 소변이나 대변은 화장실 변기에서 해결 해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아이는 방긋 웃으며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기저귀와 속옷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기저귀에 하듯이 그대로 속옷에 해결했다.

아이가 자폐로 확정 되면 부모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가 배변 문제일 것이다. 눈맞춤이 안 된다는 건 의사소통과 더불어 다방면으로 이해가 어려운 아이라는 뜻이므로, 더러움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까지도 일반 아동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저귀를 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시기, 나의 아침은 항상 아이의 속옷과 이불을 빠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배가 아프면 인상을 쓰면서 화장실이 아닌 다른 곳에 서서 배에 힘을 주고 있는 아이. 장에도 문제가 있었던 아이의 대변은 예쁜 바나나 모양도 아니었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묽은 형태여서, 외출할 때 이런 일이 발생하면 예쁘게 입혀 놓았던 새 옷은 다음에 다시 입지도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진한 색으로 물들여버렸다.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난 피할 수가 없었다. 매일 밥을 먹으면 배설을 해야만 하는 작은 사람,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돈이 많다면 매일 새 속옷와 바지를 사서 아이에게 입혀주고 싶었다. 그럼 아이에게 실수 했다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되고, 아이도 이런일로 엄마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익숙해져야 해. 오히려 아이가 배설 하지 않으면 배가 아프고 더 큰일이 난다고. 맛있게 밥 먹고 건강하게 잘 배출했구나! 라고 좋게 생각하자.’ 엄마라는 이름으로 정신승리를 외쳐보았지만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치우는 일이 유쾌한 행위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좋다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자폐 아이에게 배변 훈련을 시키는 일은 정말 많은 공이 들어갔다. 처음에야 원래 누구나 실수해, 그럴 수 있어 라고 넘어가지만 너무 많이 반복되면 정말 기본적인 신변처리도 못할 정도의 지능인 걸까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사람은 더러움을 모르고 태어난다. 엄마는 아이가 그걸 깨닫게 되기까지 유아기 때 꾸준히 일상 속에서 그것을 가르친다. 청결은 본능이 아니라 학습이다. 인간은 언제 어떻게 더러움을 배우는 걸까? 나는 더러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이 앞에서 여러 번 절망했다. 대변은 냄새나고 피하고 싶고 더러운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냄새나는 속옷을 아이 앞에 들이밀어도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엄마가 자신에게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오히려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고였다. 이런 게 자폐구나! 너무 슬펐다. 강아지도 훈련을 시키면 적당한 곳에 처리할 수 있다고. 제발.. 아이를 꼭 안으며 엄마인 나는 무너져 내렸다.

사람은 서툰 일도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훈련하면, 결국 대수롭지 않게 해낸다. 그런데 왜 이 것은.. 왜 아무리 빨고 치워도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아이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비참함의 그림자는 더 짙어져만 가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어릴 적, 신생아 때의 응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여덟 살 아이의 묽은 오물이 묻은 속옷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이가 나이를 먹을수록 먹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배설물의 모양과 냄새도 달라졌다. 사회적 나이에 맞게, 사람들에게 실수가 허용되고 이해되는 폭이 달라지는데 그건 엄마인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나 또한 아이에게 근원적으로는 타인이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신생아 때 우리는 한 몸이었다. 아이를 껴안고 매일 마음껏 예뻐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날수록 우리는 점점 분리되어갔다. 사회에서 살아가게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가르쳐야만 하는구나. 난 더 처절하게 뒷수습을 하며 가르침을 새겨넣었다. 아이가 자기혐오가 생기지 않으면서 이 부분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참 어려운 문제였다.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다가 배가 아파 얼굴을 찡그렸다. 유난히 아랫배가 묵직하고 허리가 뻐근했다.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통증에 허리가 찌릿할 정도였다.

“엄마? 엄마 응가” 아이는 내 엉덩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아이는 뭔가 웃긴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참을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엄마 응가 먹어” 아이는 이 말을 내뱉곤 웃기다고 뒤집어졌다.

“엄마 응가 먹으라고? 너 응가가 더럽다는 거 아는 거지?” 아이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너무 반가워서 감동까지 올 지경이었다. 아이는 내 엉덩이를 가리키면서 숨넘어갈 듯 웃었다.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내 엉덩이를 살펴보니, 생리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아이의 눈에는 엄마가 응가를 한 것처럼 보였나 보다. 언뜻 보면 구분이 안 될 만했다. 아이는 내 엉덩이를 보면서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아이의 응가 앞에서 이렇게 해맑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사랑은 더러움을 어디까지 받아들이는 걸까? 아이는 엄마에게 뭔가 묻은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사람은 사랑받은 만큼 자신을 용서한다. 아이의 그림자 하나 없는 미소 앞에서 나의 두려움이 녹아내렸다. 자기혐오는 혼자 생기지 않는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기억이 만든다.

“엄마에게 응가가 묻어도 좋아?” “좋아!” 아이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더러움을 가리지 못하던 아이는, 사랑도 가리지 않는 아이였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받아들여진 적이 없기 때문에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구나. 뚱뚱한 나, 돈을 벌지 못하는 나, 능력이 없는 나,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나, 못생긴 나, 내 안에 허용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수많은 나를 아이가 웃으면서 꼭 안아주었다. 엄마인 나보다 아이가 날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엄마인 내가 깔끔하고 우아하게 볼일을 본다고 해서 사랑한다거나 예쁘고 멋져서 날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엄마이기 때문에 마냥 좋은 것. 존재로서 근원적으로 허용받는 기분이었다. 세면대에서 속옷을 빨았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진 사람은 자기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거구나. 아이 덕분에 나는 한 뼘 더 넓게 자랐다. 그 이후로 속옷 빨래를 할 때마다 아이처럼 활짝 웃지는 못할지라도 인상을 찌푸리지는 않게 되었다.